밤바다 지킨 구엄 도대불

제주시 애월해안도로를 따라 구엄포구에 다다르면, 넓게 펼쳐진 천연 돌염전인 ‘소금빌레’ 곁 언덕에서 작은 현무암 석조물을 만날 수 있다. 멀리서 보면 규모가 크지 않아 지나치기 쉽지만, 가까이 살펴보면 거친 돌을 반듯하게 쌓아 올린 2단 구조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화려하고 높은 현대식 백색 등대와 달리 낮고 소박한 이 시설은 ‘구엄 옛 등대’로 불리는 구엄 도대불이다. 구엄리 주민과 어민들이 밤바다에서 돌아오는 배의 길을 밝히기 위해 힘을 모아 세운 민간 항로 표지 시설로, 제주 해안 공동체의 삶과 애환을 간직한 유적이다.
칠흑 같은 제주 밤바다
전기 조명이 없던 시절 제주의 밤바다는 짙은 어둠에 잠겼다. 제주 바다는 파도가 거칠고 곳곳에 암초인 ‘여’가 자리해, 바다로 나간 어부인 ‘보재기’가 날이 저문 뒤 포구 입구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방향을 잃은 배가 암초에 부딪혀 부서지거나 바다 위를 표류할 위험도 끊이지 않았다.
도대불이 세워지기 전에는 마을 여인들이 해 질 무렵 바닷가로 나가 횃불을 높이 들었다. 제주어로 ‘갯불’이라 불린 이 불빛에는 바다로 나간 남편과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그러나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날이면 횃불은 쉽게 꺼졌고, 어둠 속에서 포구의 위치를 꾸준히 알리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구엄리 주민과 어민들은 거친 파도를 헤치고 귀항하는 배의 안전한 길을 밝히고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돌을 모았다. 그렇게 마을의 힘으로 세운 민간 등대가 구엄 도대불이다. 국가나 관청이 주도한 시설이 아니라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주민들의 필요와 협동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마을 공동체가 세운 불빛
제주에서는 1906년 우도에 근대식 유인등대가 들어선 전후부터 도대불이 나타났으며, 일제강점기 초인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여러 포구에서 본격적으로 축조됐다. 구엄 옛 등대도 이 무렵 어민 공동체의 협동으로 건립됐다.
운영 과정에서도 마을의 자치 규율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별도의 관리자가 상시 근무한 것이 아니라, 어부들이 출항과 귀항 순서에 따라 불을 관리하는 방식이었다.
- 저녁 무렵 가장 먼저 바다로 출항하는 어선의 어부가 도대불에 불을 밝혔다.
- 불빛은 밤사이 포구의 위치를 알리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 밤샘 조업을 마치고 새벽에 가장 마지막으로 포구에 들어온 배의 어부가 불을 껐다.
가장 먼저 떠나는 사람이 불을 켜고, 가장 늦게 돌아오는 사람이 불을 끄는 공동 관리 방식이었다. 한 사람의 책임에 의존하지 않고 마을 어민들이 약속을 지키며 함께 운영했다는 점에서 당시 해안 공동체의 질서와 협동을 확인할 수 있다.
관솔과 어유로 밝힌 등불
도대불의 연료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초기에는 솔나무 옹이인 관솔을 태웠다. 제주에서는 이를 ‘솔칵’이라고 불렀다. 생선 내장을 삭혀 끓여 만든 어유도 등불을 밝히는 연료로 사용됐다. 이후에는 석유 호롱불이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불빛 자체는 오늘날의 항만 조명보다 약했지만, 주변이 어두웠던 당시에는 포구의 위치를 알리는 중요한 표지가 됐다. 해풍과 파도에 맞서 켜진 작은 불은 바다에서 돌아오는 어부들에게 귀항 방향을 가늠하게 하는 생활 속 안전시설이었다.
1974년 이후 마친 소임
수십 년 동안 구엄포구를 비추던 도대불은 주변 환경과 조명 시설이 달라지면서 점차 역할을 내려놓았다. 1974년 인근에 아세아방송국인 극동방송 송신탑이 들어섰고, 밤하늘을 밝히는 안테나 불빛이 새로운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됐다.
농어촌 전철화 사업이 진행되고 현대식 항만 조명이 보급되면서 포구의 밤은 이전보다 밝아졌다. 이에 따라 관솔과 어유, 석유 호롱불로 밤바다를 밝혔던 구엄 도대불은 오랜 소임을 마치고 퇴역했다.
상자형 2단 석축
제주 전역의 도대불은 마을에 따라 원뿔형, 방사탑형, 사다리꼴형 등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인다. 지역에서 구하기 쉬운 돌과 포구의 지형, 불을 올려놓는 방식 등이 달랐기 때문이다.
구엄리 도대불은 거칠게 다듬은 현무암을 정교하게 쌓아 만든 상자형 2단 구조가 특징이다. 아래쪽 기단 위에 폭이 더 좁은 상단을 올려 2층처럼 구성했다.
| 구분 | 형태와 규모 |
|---|---|
| 하단 기단부 | 폭 약 310cm |
| 상단부 | 폭 약 197cm |
| 석축 전체 높이 | 약 165cm |
| 전체 형태 | 현무암 상자형 2단 구조 |
윗면은 평평하고 비교적 넓게 조성됐다. 이 공간은 등화 장치를 받치는 기능뿐 아니라 파도와 바다 상황을 살피는 관망대 역할도 함께 수행했다. 낮은 높이와 단순한 형태 속에 포구의 실제 생활에 필요한 기능이 담긴 셈이다.
사라진 철제 등롱
도대불의 상단 중앙에는 원래 유리 갓과 철제 등롱이 설치돼 있었다. 유리 갓은 강한 제주 해풍 속에서 호롱불이 쉽게 꺼지지 않도록 보호했고, 철제 시설은 불빛을 더 높은 곳에 올리는 역할을 했다. 철제 등롱의 높이는 약 185cm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상부의 철제 등롱과 관련 시설은 유실됐다. 그러나 아래쪽의 견고한 현무암 기단은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있다. 남아 있는 돌의 배열과 2단 구조를 통해 당시 주민들이 바람을 견디고 불을 안전하게 밝히기 위해 어떤 형태를 선택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구엄 도대불은 거대한 건축물이 아니라, 제주 사람들이 주변의 현무암과 공동체의 힘으로 완성한 생활형 해양 석조문화유산이다.
구엄포구에서 만나는 역사
구엄 도대불은 제주시 애월해안도로 인근 구엄포구 언덕배기에 자리한다. 애월 올레 16코스를 걷거나 구엄포구를 찾을 때 함께 살펴볼 수 있다. 크기가 작고 주변 돌의 색과 비슷해 멀리서는 눈에 잘 띄지 않으므로, 포구 언덕과 소금빌레 주변을 천천히 관찰해야 형태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현장에서는 검은 현무암으로 쌓은 낮은 구조물 너머로 바다가 펼쳐진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파도 소리와 해풍이 포구 주변을 채우고, 도대불의 평평한 윗면과 단단한 석축은 오랜 세월 바다를 마주해 온 흔적을 보여준다. 현대식 등대처럼 강렬한 인상을 주지는 않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돌 하나하나를 쌓았던 공동체의 실용적인 선택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소금빌레와 함께 보는 제주
도대불 바로 곁에는 조선 시대 소금을 생산하던 구엄리 천연 돌염전인 소금빌레가 펼쳐져 있다. 소금빌레는 바닷가의 평평한 암반을 이용해 소금을 만들었던 공간이다. 도대불이 밤바다의 귀항을 도왔다면, 돌염전은 바다와 암반을 생활 자원으로 활용했던 흔적을 전한다.
두 유적은 기능은 다르지만 모두 척박한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온 제주 주민들의 생활 지혜를 보여준다. 하나는 바다에서 돌아오는 생명을 위한 불빛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닷물을 이용해 소금을 생산한 삶의 터전이었다.
구엄포구의 도대불과 소금빌레는 제주 사람들이 바다를 두려워하면서도 삶의 기반으로 받아들이고, 협동과 지혜로 어려움을 헤쳐 온 역사를 함께 전한다. 낮은 현무암 석축에 남은 흔적은 오늘날에도 구엄리 어민 공동체가 지켜낸 밤바다의 기억을 조용히 보여주고 있다.
